한민족의 국통맥
대한제국과 국민전쟁
1897년 10월 12일 창건된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까지 만12년 11개월 17일 동안 존속한 사상초유의 ‘제국’이었다. 대한제국은 짧게 존립했으나, 엄청난 업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업적은 대한제국에 대한 무지로 인해 무시되거나 일제의 업적으로 오인되어왔다.
대한제국은 한국 최초의 근대국가였다. 그러나 이 제국은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아주 잘못 알려져 있다. 이 제국에 대해 상론(詳論)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개략할 수밖에 없다. 더 자세한 것은 필자의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등을 찾아보기 바란다.
대한민국이 3·1혁명 운동을 촉발시킨 고종황제의 죽음으로 창건되었다면, 대한제국은 ‘명성황후의 죽음’으로 창건되었다. 대한제국은 왜국 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의 민비 시해에 대한 설치(雪恥)의식을 동력으로 건국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건국 원리를 이룬 것은 오래 전에 준비된 4가지 정치사상이었다. ⑴병자호란 이후 발전되어 온 ‘조선중화론’, ⑵동학 경전에서 처음 표현된, 왕권을 회복하여 국왕을 중심으로 근대화 개혁을 하려는 ‘신(新)존왕주의’, ⑶영·정조 이래 나라를 ‘임금(양반)의 나라’가 아니라 ‘백성의 나라’로 여기는 ‘민국(民國)사상’, ⑷친일 개화사상을 제치고 옛것을 바탕으로 새것을 한국화해서 받아들이는 고종의 ‘구본신참론(舊本新參論)’이 그것이다.
이 4대 건국이념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주청하던 유생들의 빗발친 상소문과 고종의 유시에 반복적으로 표명되었다. 이에 따라 1897년 10월 12일 창건된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까지 만12년 11개월 17일 동안 존속한 사상초유의 ‘제국’이었다. 대한제국은 짧게 존립했으나, 엄청난 업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업적은 대한제국에 대한 무지로 인해 무시되거나 일제의 업적으로 오인되어왔다.
대한제국은 어떤 나라였는가?
1)경제대국으로서의 대한제국
대한제국은 ‘근대’ 개념의 전측면적 의미에서 한국사 최초의 ‘근대국가’였다. 1900년대 대한제국은 창건 7-8년 만에 이미 아시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이것은 조선의 ‘초기 근대’ 전통에 서구의 ‘높은 근대’를 접목시킨 고종의 ‘구본신참론’에 입각한 광무개혁의 성과였다. 고종은 2236개소 국공립·사립 신식 학교, 각종 국립기술학교, 육군무관학교와 육군 유소년학교, 여러 국군훈련소 등을 통해 ‘광무세대’ 국민을 육성했다. (이후의 ‘일제세대’와 비교되는 ‘광무세대’ 지식인들은 거의 다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리고 대한제국에서 정부의 식산 흥업 정책에 따라 근대적 시장제도가 도입되고 근대적 농·축산업, 상·공업, 근대기업이 진흥되었다. 13도 행정 체제, 서울의 근대도시계획, 교통·통신·위생·보건 체계 등도 그때 확립되었다. 주미 한국공사관에 근무했던 한성판윤 이채연(李采淵)은 1896년 말부터 워싱턴 D.C.를 참조해 서울을 근대도시로 개조했다. 서울에 전기·전화·가로등·전신망·전차·한강철교 등을 일본보다 먼저 또는 동시에 부설하고 경인선 철도를 개통했다.
서울 도시계획이 막 시작된 1897년 비숍(I. Bishop) 여사는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1897)에서 이렇게 썼다. “더러운 서울은 극동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로 바뀌는 중이다. 이 비상한 변화는 4개월 만에 이뤄졌다.” 1896년 3월부터 1904년 1월까지 이어진 광무개혁은 7년 10개월로 짧았으나, 한국에 경제 사회적 대도약을 가져온 것이다.
1901년 독일기자 겐테(S. Genthe) 박사는 “북경도, 동경도, 방콕도, 상해도 서울처럼 전신과 전화, 전차와 전기조명을 동시에 가진 것을 자랑하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중국인은 인력거를 타고 꾸물대는데 “한국인은 쌩쌩 달리는 전차를 탄다”고 감탄했다. 1906년 헐버트(H. Hulbert)는 “20년 전에 한국을 방문했던 여행자는 물질적 변화들에 대해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라고 평가했고, 메켄지(Fr. McKenzie) 기자는 “1894-1904년 사이에 단행된 대개혁 덕택에 한국이 깜짝 놀랄 수준으로 발전했다.”고 했다.
서울의 이러한 근대적 개조는 서양의 모조품(‘짝퉁’)이 아니라 한국 특유의 독창적 패치워크였다. 겐테 박사는 1901년 당시 서울 풍경을 “진짜 철두철미 본연의 모습, 말하자면 중국도, 일본도, 아니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도 떠오르게 하지 않는 한국 본연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서울은 실로 서양의 발명품들을 대규모의 수도교통을 용이하게 하는 데 활용하는 면에서 동양의 다른 모든 대도시를 앞질렀다”고 탄복했다. 그는 “서울은 본모습이 점점 부서져 내리는 북경이나, 본모습이 희석되어 특징이 없어진 동경보다 진짜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서울의 거리에서 보는 삶의 색깔들은 북경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 그 형상은 동경보다 훨씬 더 순수하고, 이 전체 위에 항상 새롭게 놀라운 사실을 매 순간 다시 회상하게 하는 말할 수 없는 이국적인 어떤 것이 있었다.”고 했다. 서구 지식인의 눈에 비친 당시 “철두철미 본연의 모습”을 한 서울과 “본모습이 희석되어 특징이 없어진” 동경의 이러한 차이는 구본신참론적 근대화 정책을 추진한 한국과, 배알도 쓸개도 없이 서양을 맹목적으로 모방한 일본 사이에 가로놓인 ‘질적’ 문화격차였다. 비숍 여사도 “서울은 한국식으로 건설되고 있는 것이지, 유럽식으로 건설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쓰고 있다.
또 홈즈(B. Holms) 미국 시카고대 교수도 다시 확인한다. “이채연은 버섯처럼 볼록 솟은 오두막과 판잣집으로 가득했던 넓은 거리를 깨끗이 정비했다. 그는 통행로를 포장하고 도로의 보수와 유지를 위한 법령을 제정·시행했다. 서울은 이전에 북경보다 열악했지만, 지금은 동양의 어느 전통 도시보다 좋다.”고 했다. 그리고 홈즈는 “동서가 혼성된 이 천년고도 한성의 풍경은 정말로 눈에 튀고 호기심을 일으킨다”고 덧붙였다.
아관망명 1년 뒤인 1897년 당시에 이미 한국 재정상태는 크게 개선되고 있었다. 비숍은 “1897년 4월에 회계연도를 마감했을 때, 탁지부는 150만 달러를 보유했으며 300만 달러의 일본 차관 가운데 100만 달러를 갚았다.” 고 보고한다. 심지어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1900년 2월 19일 본국에 보낸 비밀 보고에서 “한국은 단순한 상업시대에서 공업시대로 들어서는 데 이르러 한 두 동양국가들과의 관계로부터 나아가 세계적 경쟁 영역에 임하고 있다.”고 하여 이를 공식 확인해준다. 이어서 하야시는 1904년 10월 29일 비밀 보고에서 “한국의 무역은 해마다 다소 소장(消長)이 있지만, 발달의 추세가 현저하다.”고 더욱 확실한 평가를 내린다.
정부의 식산 흥업 정책으로 수백 개의 근대적 기업이 일어났고, 이 기업들은 대부분 일제 시대를 관통해 ‘민족 기업’으로 살아남아 해방 후 한국 경제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가령 황립(皇立) 대한천일은행(1911년 조선상업은행으로 개칭)은 오늘날 우리은행의 전신이고, 조선의 궁중 비방을 상품화한 동아제약의 ‘활명수’는 오늘날 ‘까스명수’의 전신이다.
경제가 고속성장하면서 정부예산과 무역도 급팽창했다. 1904년 정부예산(1421만 원)은 1896년(481만 원)보다 3배 급증했고, 1904년 무역 총량은 1901년(1800만 엔)의 곱절, 1910년(6000만 엔)은 1901년의 3배가 되었다. 교역상대국은 중국·일본·대만·러시아·영국·미국으로 다변화되었다.
국민소득도 급증했다. 매디슨(Angus Maddison)의 OECD통계에 의하면 조선은 1820년 1인당 GDP가 600달러로서 중국과 공동순위였으나, 1870년 604달러로 반등하여 1870년 이전에 저점을 통과하고 1911년에는 815달러에 달했다. 그리고 한국경제의 고속 성장은 일제병탄 이후에도 관성에 따라 계속되었다. 1915년 대한제국(이때도 한국민은 자기 나라를 대한제국이라 생각했음)의 1인당 국민소득($1048)은 일제의 ‘개발 투자 없는 일방적 수탈’ 속에서도 필리핀과 인니를 앞질러 일본($1430) 다음의 아시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도약하여 그리스(1916년 $972)를 추월하고 포르투갈(1915년 $1228)에 육박했다. 1915년의 이 성과는 순전히 대한제국 시기 고속 성장의 ‘여세’로 달성된 것이다. 일제는 을사늑약 이후 1919년 3·1운동 이후까지 15년간 단돈 한 푼도 투자하지 않고 수탈에만 몰두했다. 이 고속 성장 추세가 계속되었더라면 한국은 1927년경 일본을 앞지를 판이었다.(참조: 황태연 외, 일제종족주의)
2)군사 대국으로서의 대한제국
몰지각한 자들은 대한제국이 국왕을 지킬 100명의 군대도 기르지 못했다고 조롱하는데, 대한제국은 저 고속성장을 바탕으로 1900년 전후 이미 아시아 제2위의 군사 강국으로 올라서 있었다. 고종은 ‘3만 신식 군대’를 길러 아시아의 군사 강국을 건설한 것이다. 1900년대 아시아에서 일본 외에 3만 신식 군대를 가진 나라는 없었다. 청국의 신식 군대는 청일전쟁에서 왜군에게 거의 궤멸하고, 원세개 휘하의 잔여 청군은 1900년 의화단의 난 때 만주에 진출한 러시아군에게 진멸되어 ‘청비화(淸匪化, 청나라 도적)’되어 사라진 상태였다.
고종은 1897년 2월 겨우 1000명의 신식 군대를 이끌고 경운궁(덕수궁)으로 환어(還御)했으나, 신식 병사들을 교관과 조교로 활용해 3만 신식 군대를 길러냈다. 그리고 신식병기를 러시아·영국·독일·프랑스·일본 등 각국에서 수입하거나 자체 제작해서 군대를 무장시켰다. 무기의 자체 제작은 1901년 4월부터 시작되었다.
대한제국 신식군대의 ‘실제’ 총병력은 4-5만 명에 달했다. 1900년 이후 고종은 인조 때 창설된 착호갑사(捉虎甲士) 이래 존속해 온 2만여 명의 전국 산포수들을 신식총기로 무장시켰기 때문이다.
고종은 신식군대의 창설과 유지에 국력의 절반을 쏟아 부었다. 1901년 국방예산은 1896년(약 103만 원) 대비 3.6배, 1903년은 5.2배(535만 원)로 증가했다. 1901년부터 국방비는 국가예산의 절반(1901년 41%, 1902년 38.3%, 1903년 39.5%)에 육박했다. 대한제국은 경제의 초고속 성장으로 이를 뒷받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고종은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해 민족간성을 육성했다. 일본 교관이 1894년 7월부터 훈련시킨 200여명의 ‘교도중대’는 친일괴뢰군대로서 동학군을 학살했고, 교도중대에서 개편된 친일 훈련대·친위대는 민비 시해에 가담했다. 아관망명 후 러시아 교관들이 기른 장교들도 민족정기가 취약했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지 달포 뒤 1897년 11월 29일 군부협판 주석면(朱錫冕) 주청으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창설했다. 이 무관학교는 1898년 7월 1일 개교해서 1904년까지 495명 장교를 배출했다. 그리고 고종은 무관 우대 정책을 실시했다. 가령 정장(正將, 대장)에게는 정·종 1품, 4996원을 보장해서 의정(총리)과 대등한 대우를 했고 그 아래 장교들도 비례해서 우대했다.
대한제국이 기른 민족 장교들은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장이 되어 ‘국민전쟁’을 지휘했고, 1910년 이후엔 ‘민족간성’으로서 독립군과 광복군을 이끌었다. 특히 1920년대 독립전쟁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이 주도했다. 신흥무관학교·밀산무관학교 등 만주 소재 무관학교의 교관들도 거의 다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이었다. 1911년부터 신흥무관학교에서 길러낸 장교만 세어도 8000여 명에 달한다.
고종은 4-5만 신식병력 배경으로 울릉도·독도·간도를 만국공법에 입각하여 대한제국의 영토로 확립했다. 고종은 1900년 칙령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영토로 확보하고, 1903년 8월에는 간도를 행정체제에 편입해 영토로 확립하고,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그곳에 파견해 백성을 보호·관리하기 시작했다. 대한제국 함북진위대와 이범윤의 ‘충의대(忠義隊, 두만강 연안)‘·‘사포대(私砲隊, 북간도)‘는 거듭 침입한 ‘청비(淸匪)’를 연전연승으로 물리쳐 간도를 지켜냈다. 고종은 신식군대에 의지해 ‘4000리 강역’을 확보함으로써 광개토대왕 이래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다.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1)갑진왜란(1904.2.6.)과 갑진왜변(4.14.)
갑오왜란(1894)을 일으킨 지 9년 8개월 만인 1904년(갑진년) 2월 6일 저녁 왜군은 대한제국을 재침(再侵)하는 ‘갑진왜란’을 도발했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전시중립’ 선언을 무시하고 1904년 2월 6일 1만5000명의 선발대로 마산포를, 2월 9일에는 서울을 점령한 뒤 지방 각지를 차례로 점령하고, 3만 명의 대한제국 정규군을 일부 해산하여 1만 명 수준으로 축소시켰다. 침략한 일제 총병력은 육군 4만5000명과 (육전대를 가득 실은) 수십 척의 해군 전함이었다.
일본 해군은 1904년 2월 8일 오후 4시 인천 앞바다의 팔미 해전을 도발해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왜군함대는 그로부터 7-8시간 뒤 늦은 밤 여순을 공격하고, 이틀 뒤인 2월 10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일제는 1904년 4월 14일 고종을 불태워 죽이려고 분시(焚弑)를 기도하는 ‘갑진왜변’을 일으켰다. 왜군은 1904년 4월 14일 밤 호위 무관들 4-5명을 살해하고 경운궁(덕수궁)에 침입하여 방화로 경운궁 전각을 전소시킨 것이다. 고종은 경운궁 옆의 도서관으로 피해 겨우 목숨을 구했다.
2)국민전쟁의 준비와 개전
은인자중하던 고종은 러시아 주력군이 국내로 진공하면 한반도에서 러시아군과 함께 거국적·거족적으로 결전을 치르는 항전전략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고종은 니콜라이 황제에게 보내는 비밀 친서로 러시아군이 국내로 진공하면 “국민전쟁(все-наро́дная война)”을 벌여 거족적으로 한반도에서 러시아군의 전투를 지원할 것을 약속하며 러시아군의 국내 진공을 수차 촉구했다. 그러나 35만 명의 러시아군은 어리석게도 국내 진공을 포기했고, 만주와 연해주로 양분되어 패전하고 말았다.
고종은 러군이 국내진공을 거부하고 패전하자 ‘중립’ 명령으로 종전(終戰)까지 국군의 전력(戰力)을 보존하고 있다가 결전을 치를 계획으로 차근차근 ‘국민전쟁’을 준비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기점으로 고종은 전국에 거의(擧義)밀지를 발령하여 ‘국민전쟁’에 돌입했다. 고종의 거의밀지에 따라 1906년 말부터 430명의 의병장이 전국적으로 거의(擧義)했다. 동시에 고종은 1906년 12월 1일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을사늑약 무효’를 선언했다.
이에 일제는 1907년 6월의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7월 19일 고종을 폐위시켰다. 그리고 8월 1일 중앙과 지방의 잔존 7000여 명의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했다. 그러나 이것은 ‘국민전쟁’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군대해산 당일 서울의 시위대(侍衛隊)는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제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1일 아침 군대해산에 항의해 자결하자 1연대 1대대와 2연대 1대대가 1일 8시경 봉기하여 3일간의 시가전을 벌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실탄 고갈로 분패하고 말았다.(전사 68명, 부상 100명, 포로 516명, 탈출 400명) 원주·강화 진위대도 서울 무장봉기 소식을 듣고 봉기해서 국민전쟁의 일익이 되었다.
해산 ‘국군’과 산포수를 비롯한 의병 ‘민군’은 합세하여 ‘국민군’을 이루고 전국적으로 ‘국민전쟁’을 벌였다. 1904년 2월 6일 왜군의 재침 이래 3여 년간 계속 해산당한 3만 ‘국군’의 상당수가 도처에서 ‘민군’과 결합하여 신식전력을 갖춘 ‘국군+민군’으로서의 ‘국민군’이 탄생한 것이다. 이 국민군으로 “원수부 13도 창의대진(倡義隊陣)”이 결성되었다. 1910년까지 의병장 430명 가운데 국군 출신 의병장은 무려 27%(115명)에 달했다.
‘국민군’의 전투력은 왜군을 능가했고, 국민군은 전투마다 연전연승했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30일자 기사를 보면, “강원일도와 충북에는 의병이 없는 읍(邑)이 없고 (...) 혹 고봉(高峯), 일심곡(一深谷)과 혹 안변(岸邊)으로 각처 파수하는데 일병(日兵)이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일병을 살해한 수효가 1000명 이상이오, 연사포 2문과 기관포 6문과 양총 1200-1300정과 군마 48두와 탄환 9태를 다수히 탈취했고, (...) 일병은 (...) 세가 대적할 수 없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는 검열로 인한 ‘축소보도’다. 모든 수치는 두세 곱절로 부풀려 읽어야 한다.
이강년·허위·이인영 등 전국 각지의 애국적 인물에게 무수히 내려진 고종의 밀지에 따라 1907년 11월 26-27일 결성된 ‘대한독립의군(大韓獨立義軍, 고종이 하사한 원래의 명칭), 즉 ‘원수부 13도 창의대진’은 서울을 제외한 전 지역을 ‘해방구’로 탈환했다. <대한매일신보>의 1908년 5월 6일자 기사는 “일본인은 일보라도 내지에 들지 못하며”, “고양·양주 산중에 의병이 기천 명씩 (...) 횡행함에 도저히 소부대로는 토벌키 어렵다”고 보도하고 있다.
‘대한독립의군’의 전위부대는 1907년 12월 초 서울 진공 계획을 수립하고 1908년 1월부터 허위(許蔿)의 지휘 하에 전초전을 개시했다. 왜군은 서울을 방어하기도 힘들만큼 계속 밀렸다. 통감부는 왜군이 밀리자, 본국에 원병을 요청하여 왜군·왜경을 4만여 명으로 늘리고 국민군의 공세에 강력 대처했다.
또한 거의(擧義)한 지 2년이 지나자, 국민군은 실탄이 고갈되고 무기가 다 망가져갔다. 이에 국민군은 1909년부터 무기를 구하러 만주로 북상(北上)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이 틈을 타고 비밀리에 1910년 8월 29일 전격으로 대한제국을 병탄했다. 그래도 1915년까지 국내에서 국민군의 항전은 계속되었고, 공식명칭이 ‘대한독립의군’이었던 국민군 부대들은 1920년대에 모두 ‘의(義)’자가 빠진 ‘대한독립군’으로 전환되었다.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일제의 제2차 침략전쟁인 갑진왜란에 대항한 국민전쟁은 1907년, 1908년, 1909년으로 해가 갈수록 부단히 가열되다가 만주·연해주·미주·중국 등 국외 독립투쟁으로 전환되었다. 1908년 국내 국민군 총병력 수는 약 8만3000명, 1909년 3만9000명, 총 교전회수는 1908년 1976회, 1909년은 1738회로서 해마다 엇비슷했다. 1909년에는 많은 국민군이 만주로 넘어갔기 때문에 반감된 것으로 나타나지만, 만주의 국민군이 계속 국내 진공 투쟁을 벌여 교전회수는 거의 불변이었다. 1911년까지 국민군의 총 전사자 수는 동학군 사망자 수와 비슷한 것으로 추산된다. 동학군 사망자는 전사자(3만)와 전상사망자(2만)를 합해 총 5만 명이었고, 민간피살자 포함 총사망자는 20-30여만 명이었다.(전사자 일제 통계는 1만7840명.)
고종의 마지막 구국 투쟁: 이토 처단
고종은 1907년 7월 태황제로 퇴위당한 뒤 외부와 자유로이 소통할 수 없는 ‘궁금숙청(宮禁肅淸)’ 상태에 처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대한을 최종 병탄하기 위해 왜국 정부의 특사로 러시아와 최후협상을 준비하고,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 대표인 러시아 재무상 니콜라예비치 코코체프를 만나러 열차로 대련에서 하얼빈으로 떠났다. 이토가 하얼빈으로 간다는 소식이 한국에서 처음 보도된 것은 1909년 10월 7일이었다. 고종은 이 정보를 접하고 일제의 병탄계획을 좌절시키러 이토 처단을 결심했다. 이것은 고종에게 최후의 구국투쟁이었다.
1)고종황제의 밀지와 안중근의 이토 처단
정밀 분석에 따르면, 고종은 이토의 동정을 상세히 파악하고 당시 한국 최고의 명포수로 유명했던 안중근을 ‘이토총살 특공대장’으로 임명하고 특공대를 만주로 파견했다. 안중근은 고종의 밀명을 받아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경 하얼빈 역에서 브라우닝 6연발 권총 3발을 쏘아 이토를 총살·처단했다. <하얼빈일보>의 1909년 10월 27일자 「이토 공작의 조난의 전말」 기사에 따르면 “그는 대단히 침착한 태도로 나타나 3발을 이토에게 사격한 뒤 일보 앞으로 나와 권총을 가진 손을 좌방으로 돌려 러시아의 현관(顯官)을 피해 가와카미(川上俊彦)·나카무라(中村淸次郞)·모리(森泰二郞) 3인을 부상시켰다.”고 한다. 3발이 모두 이토에 적중했고, 이토는 20여 분(러시아 기록) 뒤에 절명했다. 그런데 안중근은 거사 후 신문(訊問)과정에서 이토의 처단이 고종의 밀명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실수로) 언뜻언뜻 고종의 밀서를 보았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는 직업란에 처음에 “산포수(獵夫)”라고 써서 자신의 직업을 감췄으나, 나중에는 자신을 ‘대한독립의군’의 ‘참모중장’이라고 여러 번 밝히고 일반재판이 아니라 군사재판을 받게 해달라고 거듭 주장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안중근의 이토 처단은 그의 ‘개인적 테러’ 행위가 아니라, 고종의 밀명을 받아 “대한독립의군 특파독립대 참모중장” 신분으로 단행한 ‘국민전쟁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미·일 갈등의 격화와 러·일 접근의 본격화로 한국병탄이 코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고종은 연해주 망명정부 계획을 추진하던 1908년 이후 밀명에 따라 조직된 국내외의 연합의병부대에 ‘대한독립의군’이라는 명칭을 하사했다. ‘동의사’로 위장된 이범윤의 ‘대한독립의군’에 ‘의대조(衣帶詔, 옷 속에 숨긴 비밀조서)’로 내린 밀칙 「혈조(血詔)」에서 고종은 ‘독립의군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또 고종은 1909년 3월 15일에는 「서북간도와 부근 각지 인민들에 대한 칙유」라는 밀지도 내렸다. 안중근은 고종의 이 밀지들을 다 본 것이다.
그리고 안중근과 인터뷰한 내용을 보도한 러시아 신문 <노바야 쥐즈니>의 1909년 10월 27일자 기사에 따르면, 안중근은 “이번 암살사건에 참가한 한국인은 총 26인이고, 그들은 다 이토가 통과하는 철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러나 이토가 탄 특별열차는 중간역에서 쉬지 않고 막 바로 하얼빈까지 달려갔다. 이 통에 안중근만이 성공리에 이토를 저격할 수 있었다. 고종은 모두 26명의 ‘이토처형 특파독립대’를 파견한 것이다.
2)안중근의 ‘김두성’ = 고종황제
안중근이 신문과정에서 자신의 신분을 거듭 ‘대한독립의군 참모중장’이라고 주장하자 수사관은 임명권자가 누구냐고 물었고, 안중근은 대한독립의군 총대장 ‘김두성(金斗星)’이라고 거듭거듭 밝혔다. 일제 왜경은 이 ‘김두성’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고, 지금까지 한국 사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유학의 관점, 고종을 황위에 복위시키고자 했던 안중근의 충성스런 복벽주의, 그의 자(字) ‘응칠(應七)’등을 고려하면, ‘김두성 코드’는 의외로 쉽사리 풀린다. 《논어》<위정(爲政)>편에서 보듯이 북진(北辰, 북극성)은 임금을 상징한다. 김두성의 ‘두성(斗星)’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북두칠성의 약어다. 안중근의 아명과 훗날의 자는 ‘응칠’이다. 배에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어 북두칠성에 감응해 태어났다는 뜻으로 이름을 ‘응칠’이라 했다. 따라서 ‘김두성’은 북극성을 흠모·감응하는 ‘두성(북두칠성)’과 그 앞에 있는 ‘황금빛의 북극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7개의 북두칠성과 1개의 북극성, 즉 8개의 별 가운데 북극성은 황금빛을 내는 유일한 별이다. 따라서 북극성을 ‘금(金)’으로 표시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두성’은 안응칠이고, ‘김(금)’은 앞서 안응칠을 이끌어주는 고종 임금이다. 이에 대한 정밀논증은 필자의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에 실려 있다.
안중근은 고종을 열렬히 숭배한 복벽주의자였다. ‘김두성’ 또는 ‘금두성’은 바로 복벽주의자 안중근을 이끄는 고종인 것이다. 고종에 대한 안중근의 충성관계는 안중근의 유묵(遺墨)에서도 나타난다. 이태진 교수에 따르면, 여순에서 쓴 유묵은 모두 56점가량인데, 이것은 형식상 세 종류로 분류된다. ⑴유묵을 줄 사람의 이름을 쓰지 않고 끝에 “경술년 2월(또는 3월) 여순 옥중에서 대한인(大韓人) 안중근 서(書)”라고만 쓰고 손바닥 인장을 찍은 것(48점), ⑵유묵을 줄 사람의 이름과 관직명(‘贈000’)을 제일 앞에 쓰고 끝에 “경술년 3월 여순 옥중에서 대한인 안중근 근배(謹拜)”라고 쓰고 손바닥 인장을 찍은 것(5점), ⑶유묵을 줄 사람의 이름을 쓰지 않고 “경술년 3월 여순 옥중에서 대한인 안중근 근배”라고만 쓰고 손바닥 인장을 찍은 것(3점)이 그것이다. 이 세 번째 유묵 3점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어떤 사람에게 “삼가 인사 올리옵니다”라고 쓰고 있다. 그 사람이 누구일까? 안중근은 같은 형식의 유묵 3점 가운데 “천리 밖 임금님을 생각한다”고 쓴 첫 번째 유묵에서 안중근이 천리 밖 서울의 고종에게 이 유묵을 바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思君千里 望眼欲穿 以表寸誠 幸勿負情
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謹拜
천리 밖 임금님을 생각하니 먼눈이 빠지려 하옵니다.
한 톨 충성을 표했으니 부디 저의 충정을 져버리지 마옵소서.
경술년 3월 여순 옥중에서 안중근 삼가 인사 올리옵니다.
臨敵先進爲將義務
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謹拜
적을 만나면 앞서 나아가는 것이 장수의 의무입니다.
경술년 3월 여순 옥중에서 안중근 삼가 인사 올리옵니다.
爲國獻身軍人本分
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謹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입니다.
경술년 3월 여순 옥중에서 안중근 삼가 인사 올리옵니다.
이태진은 이 세 점의 유묵의 수신자가 천리 밖 서울의 고종황제임이 틀림없다고 결론지었다. 이것도 고종과 안중근 의거 간의 긴밀한 관계를 방증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일본 정부는 지금도 공식적으로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한다. 이런 마당에 하얼빈 의거를 ‘대한독립의군 특파독립대 안중근 참모중장’이 고종의 밀명에 따라 수행한 ‘국민전쟁의 일환’이 아니라, ‘하얼빈 영웅’의 단독 플레이로 그리는 영화를 반복 제작하는 것은 몰지각이다. 물론 근본적 죄책은 기존 사학에 있다.
에필로그
대한제국은 자대(自大)하던 ‘장난감 국가’도 아니었고, 친일·종북사가들이 서로 내통하듯 경멸하는 ‘친러 반동국가’도 아니었다. 대한제국은 사회경제적·군사적으로 번영하던 근대국가였다. 그리고 고종은 국제정세에 어두운 무능군주가 아니라, 적어도 고종을 ‘무능군주’로 욕하는 학자나 기자 나부랭이보다 자기희생적이고 용기 있는 지략(智略)군주였고, 망국을 막아보려고, 또 나라가 망한 뒤에는 복국(復國)하려고 최후의 일각까지 목숨을 바쳐 분투한 애국자였다. 대한제국과 고종을 탓하지 말고 자신의 무식을 탓하라! 근데 왜 망했냐고? 필자는 되묻는다. 지구상에 망해보지 않은 나라가 있더냐? 그리고 싸워서 조국을 되찾은 이동휘·지청천·김좌진·김규식·신규식·조성환·신팔균·이장녕·이세영을 비롯한 독립군·광복군 장교들은 모두가 대한제국 장교들이었다는 것만은 최소한 잊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