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국통맥
백제는 서기전 31년에 소서노가 요서지역에서 건국하였다
백제 시조에 대한 단재의 탁견
소서노가 백제를 건국하였다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다. 단재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원년부터 재위 13년까지의 기록을 온조왕의 통치 역사가 아니라 소서노가 백제를 창업하고 통치한 역사라고 했다.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편>은 서두에서 온조가 처음 백제를 건국할 때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온조왕 13년 기사를 보면 신하들에게 내린 조서에서 “장차 반드시 나라를 옮겨야겠다(必將遷國)”고 말하고 있고, 또 14년 기사에는 “봄에 천도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을 단재는 위례성에서 위례성으로 천도한 것이므로 말이 안 된다고 하면서 온조왕 13년까지의 기록은 온조가 아니라 소서노가 통치한 역사이며, 소서노야말로 여성으로서 한 국가를 세운 최초의 인물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단재 선생의 주장은 신뢰할 수 있는 것일까?
『환단고기』가 밝혀주는 백제의 건국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서는 백제가 서기전 31년에 소서노가 건국하였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혀주고 있다.
(가) 고주몽 성제가 재위하실 때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만약 적자 유리가 오면 마땅히 태자로 봉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소서노(召西弩)는 장차 자신의 두 아들(비류와 온조)에게 이롭지 못할 것을 염려하다가, 경인년 3월에 사람들에게서 패대(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달려가 진번(辰番) 사이에 있는 바다 가까운 외진 땅에 이르렀다.
(나) 그곳에 산 지 10년 만에 밭을 사서 장원을 두고 재산을 모아 수만 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따르는 자가 많았다. 남으로 대수(帶水)에 이르고 동으로 큰 바다에 닿는, 5백 리 되는 땅이 모두 그의 소유였다. 그리고 주몽제(朱蒙帝)에게 사람을 보내어 글을 올려, 섬기기를 원한다고 했다. 임금께서 매우 기뻐서 칭찬하시고 소서노를 책봉하여 어하라(於瑕羅)라는 칭호를 내리셨다.
(다) (어하라 재위) 13년 임인년에 이르러 소서노가 세상을 떠나고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라) 이때 마려 등이 온조에게 이르기를, “신이 듣기로 마한의 쇠망이 임박하였다 하니 가서 도읍을 세울 때라 생각하옵니다” 하니, 온조가 “좋다”라고 하였다. 이에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먼저 마한의 미추홀에 이르러 사방을 돌아다녀 보았으나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오랜 뒤에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살만한 땅을 찾아보았다. 그때 마려, 오간 등 신하 열 명이 간하였다. “오직 이곳 하남(河南) 땅은 북으로 한수(漢水)를 끼고, 동으로 높은 산이 자리잡고, 남쪽으로 기름진 평야가 열리고, 서쪽은 큰 바다(황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처럼 천연적으로 험준한 지형과 지리적인 이로움은 얻기가 쉽지 않은 형세이오니, 마땅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다른 곳을 더 찾지 마옵소서.” 온조가 신하 열 명의 의견을 좇아 드디어 하남 위지성(慰支城)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백제’가 왔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仍稱百濟 以百濟來故得號也). 뒤에 비류가 세상을 떠나자 그 신하와 백성이 그 땅을 바치며 복종했다.
백제 탄생 과정이 『삼국사기』 내용과는 상이한 부분이 많다
(가)에서는 우선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 이름이 소서노(召西弩)라고 나오고 있다. 『삼국사기』에서 소서노(召西奴)는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로서 우태와 결혼해서 비류와 온조를 낳고 과부로 살다가 고주몽과 재혼한 여인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여러 기록에 졸본부여 왕의 둘째 딸로 고주몽과 혼인한 바로 그 여인이며, 이름이 소서노(召西弩)임을 처음으로 밝혀주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국본기」에서는 이때 동부여에서 장자 유리가 아버지 고주몽을 찾아오자 곧바로 그를 태자로 삼았고, 그때가 재위 19년 여름(4월)인데 5개월 뒤에 왕이 40세로 승하하자 곧바로 제위에 오른 것으로 나온다. 이에 비류와 온조가 이를 비관하여 새로운 나라를 개창하려고 남쪽으로 떠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유리가 오기 전부터 고주몽이 ‘만약 유리가 온다면 유리를 태자로 봉할 것’이라고 말을 해왔기 때문에 평소에 늘 그 말을 들어왔던 소서노가 이를 염려하여 두 아들과 함께 남쪽으로 떠나는 것으로 나온다. 『삼국사기』에서는 비류와 온조가 남쪽으로 떠날 때 소서노가 함께 떠났다는 기록이 없는 반면, 『태백일사』에서는 오히려 소서노가 이를 주도하고 있다. 새로운 나라를 개창한 주인공이 소서노라는 것을 말한다.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풍문을 듣고 남쪽으로 갔는데 배달의숙본 『환단고기』에서는 이때가 경인년 3월이라고 하였다. 경인년은 서기전 31년인데, 이것은 연대상으로 전혀 맞지 않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광오이해사본 『환단고기』에서는 경인년이 아니라 기묘년(서기전 42년)이라고 되어 있다. 1911년에 발간된 『환단고기』 초간본을 필사한 필사본이 광오이해사본의 저본이 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1911년판 초간본 『환단고기』에서는 기묘년으로 표기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나)에서는 ‘그곳에 산 지 10년 만에’ 재산을 일구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서 고주몽 성제에게 섬기기를 원한다는 편지를 보냈고, 그것을 본 임금께서는 ‘매우 기뻐서 칭찬하시고 소서노를 책봉하여 어하라(於瑕羅)라는 칭호를 내리셨다’고 했다.
(다)에서 소서노는 어하라로 책봉을 받은 지 13년이 되던 임인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는데, 임인년은 서기전 19년이다. 임인년이 13년째가 되려면 어하라 책봉을 받은 해는 경인년인 서기전 31년이 된다. ‘어하라’는 백제의 왕호를 이르는 것으로, 어하라를 내렸다는 것은 소서노를 왕으로 인정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백제는 서기전 31년에 소서노가 건국한 나라라는 결론이 성립한다. 그리고 책봉을 받았다는 것은 백제가 고구려의 제후국으로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소서노는 언제 고구려를 떠났을까? (나)에서 ‘그곳에 산 지 10년 만에’ 어하라 칭호를 받았다고 했으니, 경인년으로부터 10년 전에 떠났을 것이다. 경인년보다 10년 전이면 경진년인데 광오이해사본의 기묘년은 경진년과 1년 차이가 나지만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소서노가 고구려를 떠난 직접적인 이유가 동부여에서 유리와 고주몽의 본처인 예씨가 온 데 따른 본인과 두 왕자의 지위나 장래에 대한 불안이었다면, 고구려를 떠난 시점은 유리가 온 이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유리는 언제 왔을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리가 재위 19년 4월에 아버지를 찾아오고, 5개월 뒤인 9월에 고주몽 성제가 40세로 승하하자 왕위를 이었다고 했다. <유리명왕 편>에서도 이때 “부왕을 만나 부러진 칼을 바쳤는데, 왕이 자기가 가졌던 부러진 칼 조각을 꺼내어 맞추어 보니 하나의 칼로 이어져서 왕이 기뻐하여 그를 태자로 삼고 왕위를 잇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내용은 다소 비현실적이다. 나라가 아직 반석 위에 올려져 있다고 보기 어려운 초창기임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아무리 장자라지만 태어나서 줄곧 평민으로 살아왔던 사람이 곧바로 태자에 봉해지고, 불과 5개월 후에 왕이 되었다는 것은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리가 왕위를 물려받은 것은 사실이므로 그가 태자가 되고 얼마 안 있어 부왕이 승하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것이다. 재위 19년에 유리가 왔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사실이라면 임인년이 아니라, 사실은 신사년(서기전 40년)이 된다. 고주몽이 졸본부여의 왕이 된 시점이 계해년(서기전 58년)이기 때문이다. 즉 신사년이 바로 유리가 아버지와 상봉한 때이자, 소서노와 두 아들이 고구려를 떠난 시점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소서노가 두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떠나 10년이 되는 시점인 경인년으로부터 1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사년이 된다. 따라서 유리는 신사년에 고구려로 온 것이고 이때 소서노와 두 아들이 고구려를 떠난 것이다. 그리고 유리는 고주몽이 동부여를 떠나오던 임술년에는 태중에 있었으므로 계해년에 태어났을 것이다. 따라서 신사년에는 유리가 19세였으며, 고주몽은 임인년(서기전 19년)에 승하하였으므로 유리는 태자로서 5개월이 아니라 무려 22년을 지내다가 고구려 2대 황제로 즉위한 것이다.
(라)에서 소서노가 어하라 재위 13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다는 것은 『삼국사기』 기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야기이다. 건국 시조 소서노의 뒤를 이어 두 번째 왕이 된 사람은 비류였다. 비류가 분명 왕을 했었던 사실이 와전되어 ‘비류시조설’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비류는 지도력이나 인성에 문제가 있었는지 왕이 되었는데도 따르는 사람이 없었고, 나라가 제대로 경영이 되지 못했다. 이에 온조는 마한이 있는 지금의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이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와 비슷하지만 소서노가 백제를 건국을 한 후 13년간 통치하다가 죽고, 비류가 다음 제위를 물려받은 시점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기억하고 봐야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비류와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올 때 어머니도 함께 내려왔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은 온조가 한반도 땅으로 와서 새로운 터전을 물색하던 시점이 소서노 사후였기 때문이다. 국호를 ‘백제’라고 했는데, ‘백제가 왔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以百濟來故 得號也)’이라고 했다. 언뜻 보면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이것은 소서노가 처음 건국한 나라의 국호가 ‘백제’였음을 말한다. 즉 어머니 소서노가 세운 나라가 백제였기 때문에 그 국호를 온조가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소서노가 세우고 비류가 이어받은 원래의 백제는 비류가 죽음으로써 망했지만 신하와 백성들이 한반도의 마한 땅으로 이주한 온조에게 그 땅을 바치며 귀부(歸附)하자 온조가 이들을 받아들이면서 백제를 새로운 나라의 국명으로 그대로 가져다 썼던 것이다.
이처럼 백제는 『삼국사기』에서 주장하듯 서기전 18년에 건국된 것이 아니라, 이보다 13년 앞선 서기전 31년 경인년에 소서노가 세운 나라임이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 기록의 재검토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서 『삼국사기』를 보면 의아했던 부분이 해소가 된다.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편 13년 조>의 기사를 보자.
13년 봄 2월에 왕도에 늙은 할미가 남자로 둔갑하였고, 호랑이 5 마리가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이때 나이가 61세이셨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길, “국가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어서 그들이 국경을 침공하여 편한 날이 적다. 하물며 요즘에는 요상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께서 돌아가시니 나라의 형세가 불안하여 반드시 장차 나라를 옮겨야겠다. 내가 전에 순행을 나가서 한수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오래토록 편안함을 도모하리라.” 하였다. 가을 7월에 한산 아래로 가서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 백성을 이주시켰다. 8월에는 마한에 사신을 보내서 천도를 알리고 마침내 국경을 정하였는데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이 경계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쪽 끝은 주양이었다. 9월에 성과 궁궐을 세웠다.
이 해에 국모인 소서노가 세상을 떠나고 나라의 형세가 불안해서 나라를 옮겨야겠다고 말하고 있다. 도읍지를 옮기는 것을 천도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천도(遷都)가 아니라 ‘천국(遷國), 즉 나라를 옮긴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소서노를 이어 비류 태자가 왕이 되자 온조가 웅지를 품고 한반도 마한 땅에 새로운 나라를 개척하는 상황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편>의 서두에서는 온조와 비류가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와서 비류는 미추홀로, 온조는 위례성으로 왔다고 해놓고, 이처럼 <온조 13년 조>에 또다시 위례성으로 천도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한에 사신을 보내서 천도를 알리고 국경을 정했다는 것도 건국한 지 13년이나 지난 시점의 상황에서는 생뚱맞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백제 건국 13년에 한반도 남부 마한 땅에 처음 온 온조가 터전을 잡고자 그곳의 터줏대감이나 다름없는 마한 왕에게 예를 표하고 양해를 구하기 위해 사신을 보낸 것으로 보아야 자연스럽다. 결국 온조왕 13년의 기록은 소서노가 통치한 역사였음을 고백하는 기록으로 추론된다.
온조왕 재위 13년에 “왕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61세이셨다.”라는 기사는 사실일까? 온조왕 재위 13년이 사실은 소서노 재위 13년에 해당하므로 이것은 사실로 볼 수 있다. 소서노는 재위 13년 임인년에 세상을 하직하였으므로 이해에 61세(환갑)라면 1주갑 전인 임인년(서기전 79년)에 탄생했음을 알 수 있다. 소서노가 언제 태어났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데, 『삼국사기』가 그 진실을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고주몽과는 동갑내기이자 둘이 같은 해에 세상을 하직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