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국통맥

고려 서경(西京) 위치

고려 태조 왕건은 죽기 1개월 전(9434) 대광(大匡) 박술희에게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내렸습니다. 이후 고려 왕들은 중대한 사안을 결정할 때 훈요십조를 준거로 인용했습니다. 훈요십조중 다섯째가 내가 삼한 산천의 음우(陰佑)에 힘입어 대업을 이루었다.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서 우리나라 지맥의 뿌리가 되고 대업을 만대에 전할 땅이다. 마땅히 춘하추동 네 계절의 중간 달(四仲月)에 왕은 그곳에 가서 100일이 넘도록 체류함으로써 안녕에 이르도록 하라.”라는 고려 서경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훈요에 따라 고려 왕들은 수시로 서경으로 행차했고, 서경에 왕의 정무를 뒷받침할 관청의 분사(分司)가 설치됐습니다.

고려가 서경을 중시했던 첫 번째 이유는, 고려의 정통성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서경을 고구려 도성 중 하나였던 평양성(平壤城) 지역에 설치하여, 고려가 고구려를 정치적·영토적으로 계승했다는 점을 확실히 했습니다. 고려 성종 12(993) 요나라 제1차 침입 때, 요나라 장수 소손녕이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 소유인데, 너희들이 침범해 왔다.라고 말하자, 서희는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이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다.라고 응수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고려 북방 정책의 거점이자, 서북 경계의 중요한 군사 거점이기 때문입니다. 고려 성종 9(990) 9, 성종은 서경을 순시한다는 교서에서, “오랑캐를 막아 국경을 굳건히 하고자 하여 웅도(雄都) 평양(平壤)에 의지하여 우리 조종(祖宗)의 패업(霸業)을 공고히 하셨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고려 서경의 위치는 한국 역사 지리 연구에서 중요한 주제입니다. 고려 서경의 위치를 통해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 위치를 정할 수 있고, 고려 서북 경계를 대략적이나마 추정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장1, 평안남도 대동강 중류

고려 서경의 위치에 관해, ‘평안남도 대동강(大同江) 중류 지역(현재 평안남도 평양시)’이라는 주장과 중국 요녕성 태자하(太子河) 중류 지역(현재 요녕성 요양시)’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평안남도 대동강 중류 지역 주장은 세종실록』 「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주된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본래 삼조선과 고구려의 옛 도읍으로, 당요 무진년 신인(神人)이 태백산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으로 삼고 평양에 도읍해서 단군(檀君)이라 일컬었다. 이것이 전() 조선이고, 주 무왕이 상()을 이기고 기자(箕子)를 여기에 봉하니, 이것이 후() 조선이다. 41대 손 준()에 이르러, () 사람 위만(衛滿)이 그 땅을 빼앗고 왕험성(王險城)에 도읍했다. ()은 검()이라고도 쓰는데, 바로 평양(平壤)이다. 이것이 위만조선이다. 그 손자 우거(右渠)가 한()의 조명(詔命)을 받들려 하지 않으니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여 사군(四郡)으로 만들고 왕험성을 낙랑군(樂浪郡)으로 삼았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15년 국내성(國內城)으로부터 옮겨와 도읍했다. 보장왕 27년 당() 고종(高宗)이 이적을 보내 신라와 함께 협공(夾攻)하여 고구려를 멸하고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었고, 좌위위대장군 설인귀(薛仁貴)에게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진무하게 했다. 뒤에 당 군사가 떠나자 그 땅이 모두 신라로 들어갔다. 고려 태조 원년 평양이 황폐하였기 때문에 염주(鹽州백주(白州황주(黃州해주(海州봉주(鳳州) 등 여러 고을의 백성을 옮겨서 인구를 채워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삼았고, 조금 뒤에 서경(西京)으로 삼았다.(신증동국여지승람51 <평안도 평양부 조>)

 

세종실록』 「지리지1454, 신증동국여지승람1462년에 편찬된 조선 초기의 지리지로, 그 내용에 큰 차이는 없습니다. 두 책은 고조선 왕험성,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 고려 서경이 모두 조선 시대 평안도 평양부(平壤府) 지역에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평안도 평양부는 현재 대동강 중류 지역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사에 등장하는 모든 평양 관련 지역을 모두 평안도 평양부로 본다면 역사 기록 해석이나 연구에 모순이 발생합니다.

904년 궁예가 마진(摩震)’을 개국하자, 각 지역 호족들이 궁예를 따르기(歸附) 시작합니다. 그중 평양성주(平壤城主)’라 불리는 장군 검용(黔用)도 있었습니다.(삼국사기권 제50 열전10 <궁예조>) 장군 검용의 근거지였던 평양성을 위 책들의 기록을 근거로, 평안도 평양부 지역, 즉 대동강 중류 지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설치 전 서경은 황폐한 지역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위 책들도 적고 있습니다. 통일신라 말 호족이 성장할 정도로 경제적 기반을 갖춘 지역이, 서경이 설치된 921년 약 20년 사이에 황폐한 지역으로 변할 가능성이 작고, 그 이유로 추정해 볼 수 있는 사건도 밝혀진 것도 없습니다.

1388년 고려 우왕은 명나라와 철령위(鐵嶺衛) 설치 문제로 요동 정벌을 결정하고, 요동 정벌군을 지휘하기 위해 평양(平壤)으로 행차했습니다. 그리고 반란죄로 처벌된 임견미와 염흥방의 재산을 몰수해 요동 정벌의 자금으로 사용하고자 서경으로 운반하게 했습니다(고려사137 열전50 <우왕 144월조>). 두 책의 기록대로 고려 우왕이 행차한 평양과 임견미와 염흥방에게 몰수한 자금을 보낸 서경이 같은 대동강 중류인 평안도 평양부 지역이라면, 두 지역을 구분해 적은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두 지역을 구분했다는 것은 두 지역이 다른 지역일 가능성을 가집니다.

이러한 모순들은 세종실록』 「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平壤지명이 여러 곳에 있을 가능성과 재난·질병·전쟁 등으로 주민이나 행정구역이 이동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조선 시대 평안도 평양부가 대동강 중류에 있었다고 해서, 같은 이름의 고구려 평양성도 대동강 중류에 있었고 거기에 설치된 고려 서경도 대동강 중류에 있었다고 보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주장2, 중국 요령성 태자하 중류

중국 요령성 태자하 중류 지역이라는 주장은 요사(遼史)』 「지리지에 주된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본래 조선 땅이었다.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옥중에서 풀어 주고 그가 조선으로 가자, 그 땅에 책봉하였다. 한나라 초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옛 공지에서 왕이 되었다. 무제 원봉 3년에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임둔·낙랑·현도 4군으로 삼았다. 서진 때 고려에 함락되었다. 뒤에 모용수에게 귀의하였다가 그 아들 모용보가 고구려 왕 안()을 평주목사로 삼아 그곳에 살게 하였다. 원위(元魏) 태무제(太武帝)가 그가 사는 평양성(平壤城)으로 사신을 보내니, 요나라 동경이 본래 이곳이었다.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요사38 지 제8 지리지2 <동경 요양부 조>)

 

요사』 「지리지는 요나라 동경인 요양부가 고구려 평양성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북위 태무제의 재위 기간이 423~452년인 점, 고구려 장수왕이 435년 북위로 사신을 보내자 북위도 사신을 보내 장수왕에 관직을 내렸다는 기록(삼국사기권 제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23년 조>) 등을 참고하면, 태무제가 사신을 보낸 평양성은 고구려 장수왕이 427년 옮긴 평양(平壤)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요나라 동경인 요양부는 현재 중국 요령성 태자하 중류 일대, 즉 요령성 요양시 일대로 보고 있습니다.

요나라는 발해를 멸망시킨 후, 928년 태자하 중류 일대에 남경(南京)을 설치했다가, 938년 남경을 동경으로 고치고 요양부를 두었습니다. 고려 서경이 태자하 중류 일대에 설치됐다면, 그 설치 시기가 921년이므로 요나라는 고려 서경 또는 그 주변 일대를 점령한 뒤 남경을 설치했다고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사, 요사등 관련 역사 기록에서 이러한 내용을 찾을 수 없습니다. 고려 서경이 가지는 의미로 볼 때 역사 기록에서 빠뜨렸을 가능성은 적습니다.

요나라는 다종족(多種族) 국가로, 종족 사이의 화합을 위해 불교를 장려했으며, 요나라 귀족이나 지역 세력가들은 자신들의 지역에 불탑(이하 요탑(遼塔))을 조성했습니다. 이 요탑 분포로 볼 때 태자하 상류에서 중류 일대 모두가 요나라 영역일 가능성이 큽니다.


서경 위치 추정

이처럼 고려 서경 위치에 관한 선행연구는 역사 기록이나 고고학 자료와 맞지 않는 점이 존재합니다. 역사 기록, 고고학 자료, 현지 조사 등을 통해 고려 서경 위치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려 서경 위치를 직·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지도, 그림, 기록 등은 남아 있지 않아,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기록 등을 참고해 현지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그 위치를 추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집안시의 서쪽


7월 평양(平壤) 동쪽 황성(皇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지금의 서경 동쪽 목멱산 중에 있다. (삼국사기권 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13년 조>)

 

246년 고구려 동천왕은 조위(曹魏) 관구검(毌丘儉)이 쳐들어와 도성인 환도성(丸都城)이 황폐해지자 247년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료와 사직을 옮겼습니다. 342년 고국원왕이 다시 환도성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같은 해 11월 전연(前燕)의 침략으로 환도성으로 함락당하자 평양성 동쪽 황성으로 거처를 다시 옮겼습니다. (이 평양성이 장수왕이 옮긴 평양성과 같은 지역인가는 연구가 더 필요합니다.)

삼국사기는 이 황성을 고려 서경 동쪽 목멱산에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황성은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옮기기 전까지 고구려의 도성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고구려 왕은 고국원왕-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왕-장수왕이었습니다. 현재 중국 집안시(集安市)에 고구려의 건국 역사, 광개토왕 업적 등을 새긴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가 있습니다. 왕의 무덤은 도성에 조성하는 것이 관례이므로, 집안시 일대가 광개토왕 당시 도성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의 황성이 집안시 일대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황성이 집안시 일대라면, 고려 서경은 그 서쪽 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구려 유물,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지역

고려 태조 왕건은 즉위 후 여러 신하에게 평양은 옛 도읍으로 황폐한 지 비록 오래지만 터는 그대로 남아 있다. 마땅히 백성을 이주시켜 그곳을 실하게 하여 변방을 튼튼하게 함으로써 백세(百世)의 이익이 되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고려 서경 설치 계획을 시작합니다(고려사1 세가권 제1 <태조 원년 9월 조>). 고려 이전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국가는 고구려뿐이므로, 고려 서경 설치 지역은 고구려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는 지역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산과 하천으로 둘러싸인 분지

1135년 묘청(妙淸)은 서경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키자, 고려 인종은 김부식 등을 보내 진압하게 했습니다. 진압군을 본 서경 사람들이 묘청 등을 죽이고 항복했지만, 조광(趙匡) 등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김부식은 다시 진압군을 이끌고 고려 서경을 도착해 공격 방안을 세웁니다. 김부식은 서경은 북으로 산과 언덕을 등지고 삼면은 물로 막혔으며, 성이 또 높고 험하며 서둘러 함락하기는 쉽지 않으므로 성을 둘러싸고 진영을 펼쳐서 그들을 압박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고려사98 열전권 제11 <제신 김부식 조>). 이 기록을 참고하면, 고려 서경은 북으로 산과 언덕을 등지고 삼면은 물로 막힌 곳으로 사방이 산과 하천으로 둘러싸인 분지(盆地) 지역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군사 요충지

990년 고려 성종은 고려 서경으로 행차할 계획을 세우고 교서를 내립니다. 그 내용 가운데, 고려 서경 일대를 인후지지(咽喉之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고려사3 세가권 제3 <성종 9년 조>). 인후지지는 목구멍과 같은 곳을 의미하며, 매우 중요한 길목을 의미합니다. 고려 서경은 교통이 편리하고 고려 국경 상에 중요한 군사 요충지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상으로 역사 기록에 남아 있는 고려 서경의 역사·자연환경 특징을 종합해 보면, 고구려 황성인 현재의 중국 집안시 서쪽에 있고, 고구려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으며 분지 지형에 교통이 발달한 지역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서경 위치, 환인만족자치현

집안시 서쪽 지역에서 도성으로 추정할 수 있을 정도의 고구려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고, 분지 지형에 교통이 발달한 지역을 현지 조사를 통해 확인한 결과, ‘환인만족자치현(桓仁滿族自治縣)’이 있습니다.

환인만족자치현은 알려진 것처럼 오녀산성, 미창구 무덤군 등 고구려 유적과 유물이 다수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환인만족자치현은 중국 요령성 동부 산간 지역의 혼강(渾江) 중 하류 지역에 있습니다. 이 지역은 산이 많은 지역으로 산봉우리가 계속해서 이어지며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습니다. [화발자산(花脖子山, 해발 1336m), 노독정자산(老禿頂子山, 해발 1325m)] 그리고 그 주변으로 혼강, 육도하(六道河), 합달하(哈達河)가 흐르며, 이들 강의 퇴적 활동으로 평원(平原)을 이루고 있습니다. 

환인만족자치현은 북쪽으로 신빈만족자치현(新賓滿族自治), 남쪽으로 관전만족자치현(寬甸滿族自治縣), 서쪽으로 본계현(本溪縣), 동쪽으로 길림성 통화현(通化縣)과 집안시와 경계를 접합니다. 그래서 이들 지역으로 통하는 201, 506번 국도 등이 지나며, 과거에 주변 하천 등을 통해 이들 지역과 교류했다고 합니다. 

환인만족자치현 일대가 고려 서경일 가능성은 고고학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녀산성(五女山城)은 환인만족자치현 오녀산(五女山, 해발 800m) 정상부 둘레에 축성한 테뫼식 산성으로,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난공불락의 요새를 이루고 있습니다. [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등은 1996~1998, 20034차례에 걸쳐 오녀산성을 발굴을 진행했으며, 그 결과를 보고서로 간행했습니다.(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 편저, 오녀산성, 문물출판사, 2004)

발굴 조사 결과 오녀산성의 문화유적은 크게 5개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1기는 신석기시대 늦은 시기, 2기는 청동기시대 늦은 시기, 3기는 고구려 시기. 4기는 고구려·발해 시기, 5기는 금나라 시기에 해당합니다. 4기가 가장 유적과 유물이 풍부한데, 발해 시기 유물은 소량 발견됐습니다.

발굴 조사에서 주목되는 점은 제5기 문화유적에서 북송(北宋) 시기의 동전(銅錢)이 다수 발견됐다는 것입니다. 동전의 종류와 유통 시기를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습니다.

 

동전명

주조 시기

출토지

五銖

기원전 2세기~ (전한)

J1, F56

大泉五十

7~14 (후한)

J1

開元通寶

621~960 (, 오대십국)

F18, F34, F44

宋元通寶

960 (북송)

F55

太平通寶

976~984 (북송)

F34

淳化元寶

990 (북송)

F44, F61

至道元寶

995 (북송)

서문, F55

咸平元寶

998~1003 (북송)

J2(지표), F18, F44

景德元寶

1004~1007 (북송)

F44, F55

祥符元寶

1008~1016 (북송)

서문, F18, F34

祥符通寶

1008~1016 (북송)

F18, F62, F68

天禧通寶

1017~1021 (북송)

F34

天聖元寶

1023 (북송)

F60,F61

景祐元寶

1034 (북송)

J2(지표)

皇宋通寶

1039~1054 (북송)

F18, F50, F60, F61, F62

嘉祐通寶

1056~1063 (북송)

서문, F18, F53

嘉祐元寶

1056~1063 (북송)

F18, F55, F68

治平元寶

1064~1067 (북송)

F61, H9

元豊通寶

1078~1085 (북송)

F18, F50, F55, F59, F61, F62, F64, F67

元祐通寶

1086~1093 (북송)

서문, F34, F44, F50, F55, F61, F62, F64

紹聖元寶

1094 (북송)

H9

聖宋元寶

1101 (북송)

F44, F59, F62

崇寧通寶

1102~1106 (북송)

F62

至和元寶

1054 (북송)

F18

熙寧元寶

1068~1077 (북송)

F18, F55, F61

政和通寶

1111~1117 (북송)

F62

大定通寶

1178 ()

F61, F62

 

고려 서경은 921년 설치된 후, 1135년 묘청의 난, 1170년 정중부의 난, 1269년 최탄의 난 등으로 12세기 이후 제2의 도성에서 지방 도시로 전락하면서 과거보다 정치·경제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게 됩니다. 오녀산성에서 발굴된 동전들로 볼 때, 환인만족자치현 일대는 북송 전 시기에 걸쳐 송나라와 교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번성했던 곳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시기는 고려 서경이 정치·경제적으로 번성했던 시기와 대략 일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현재의 환인만족자치현이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 내륙지역인 점을 고려한다면, 지리적 특성이나 이점으로 송나라와 활발하게 교역했다고 생각할 수 없고, 정책적 계획과 후원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 도성이었던 평양성에 설치된 점과 고려 북방 경계에서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다는 점에서, 고려 서경 위치는 한국사 역사 지리 연구에 중요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고려 서경 위치는 현재 평안남도 대동강 중류 또는 중국 요령성 태자하 중류로 추정하고 있지만, 역사 기록 해석에 모순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려 서경 위치를, 단편적이지만 역사 기록 등을 근거로 현지 조사를 통해 확인해 본 결과, 고려 서경은 지금의 중국 요령성 환인만족자치현 일대에 설치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환인만족자치현 오녀산성에서 출토된 다수의 북송 시기 동전들이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합니다. 고려 서경이 고려 왕들의 정책적 계획과 후원으로 10세기~12세기까지 정치적·경제적으로 번성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고려 서경이 환인만족자치현 일대에 설치되었다면, 고구려 도성인 평양성의 위치나 고려 서북방 경계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할 것이며, 앞으로 관련 연구도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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