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국통맥
한국사의 잃어버린 고리, 북부여
1. 국사교과서에 실린 부여의 실체
고조선 멸망 이후 열국 시대에 여러 나라의 등장으로 처음 거론되는 것이 부여이다. 북만주 송화강 유역에 위치하여 농경과 목축이 발달하였고, 왕을 중심으로 마가·우가·저가·구가 등이 ‘사출도’라는 지역을 다스렸으며, 중국의 군현과 활발하게 교류하여 발전하다가 고구려가 강성해지자 세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이 교과서를 통해 알려진 부여의 역사이다.
이러한 부여사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후한서』, 『위략』과 같은 중국 사서에서 전하는 단편적 기술에 기반한 서사이다. 중국의 사서는 공자의 춘추필법(春秋筆法)에 뿌리를 두고 발전한 지나(支那)의 3대 사필원칙(史筆原則)에 충실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타민족의 역사는 축소지향적인 기술임을 감안하여 취할 필요가 있다.
① 존화양이(尊華攘夷) : 중국(화하족)을 높이고 외국(이족)은 깎아 내린다.
② 상내약외(詳內略外) : 중국사는 상세히, 이민족의 역사는 간단히 기술한다.
③ 위국휘치(爲國諱恥) : 중국을 위해 중국의 수치를 숨긴다.
그렇다면 부여에 관한 기록을 전하는 한국의 사료는 없을까. 한국의 사서인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도 부여는 물론이거니와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남부여 등의 다양한 부여를 기술하고 있다. 그럼에도 역사연구자들이 자국의 사료를 경시하고 중국의 사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까닭에 부여의 실상을 드러내는 작업이 지지부진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삼국유사』는 <북부여 조>와 <동부여 조>에서 북부여와 동부여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지만 그 내용이 다소 간략하고 함축적이어서 전체 맥을 잡거나 인물 간의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도 한몫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한국사의 기록으로 전해지는 여러 부여는 중국 사료에 등장하는 ‘부여’라는 두 글자로 평정되고 말았다.
2. 부여사의 전모를 밝혀주는 『북부여기』와 『가섭원부여기』
이런 상황에서 부여사를 복원함에 있어 북부여, 동부여, 갈사부여, 서부여 등 여러 부여를 총체적으로 기록하여 부여사의 전모를 밝혀주는 등불과도 같은 보서(寶書)가 있으니, 바로 복애거사(伏崖居士) 범장(范樟)이 저술한 『북부여기』와 『가섭원부여기』이다.
범장은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사관(仕官)의 뜻을 버리고 두문동에 은거하여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인’ 중 한 분이다.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조선에 출사하지 않은 충의로운 역사적인 인물인데, 범장의 『북부여기』 편찬에는 소전거사(素佺居士)라는 배후의 손길이 있었다. 『태백일사』의 기록에 따르면, 범장이 이명 그리고 이암과 함께 천보산 태소암에 머무를 때 소전거사에게서 환단시대 이후로 전해 내려오던 우리 고유의 사서와 신교정신을 담고 있는 많은 비장 서적을 전수받게 된다. 이로써 한민족의 뿌리 역사와 정신세계를 더 소상히 알게 되었고, 국호만 살아있을 뿐 주권을 상실한 고려의 현실을 통탄하면서 이암·범장·이명은 한민족사를 되찾을 것을 굳게 결의하게 된다. 이것이 ‘3인의 역사광복 결의동맹 사건’이다. 그리하여 이암은 『단군세기』를, 범장은 『북부여기』 상·하를 저술했고, 이명은 조선 숙종 때 북애가 지은 『규원사화』의 저본이 된 『진역유기』 3권을 쓰게 되었다.
범장이 남긴 한민족사의 소중한 기록인 『북부여기』와 『가섭원부여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어 사료로써 역사적 의의가 크다.
첫째, 여러 부여의 역사를 기술하여 부여의 총체적인 역사 흐름을 파악하게 한다.
둘째, 북부여의 건국 시조인 해모수의 실체를 처음으로 밝힌다. 『삼국유사』에서 해모수는 베일에 쌓인 수수께끼의 인물이지만, 『북부여기』는 북부여의 건국자로서 해모수를 역사 속 실존 인물로 전하고 있다.
셋째, 한 무제의 침공을 막아낸 구국의 영웅이자 후기 북부여 시대를 연 고두막한에 대한 기록을 전한다.
넷째, 고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임을 밝히며 북부여의 국통이 고구려로 이어졌음을 전한다.
다섯째, 만주와 대륙에서 여러 부여사가 전개되는 동안 고조선 강역에서 펼쳐진 또 다른 한민족사를 전하고 있다. 위만 정권, 최숭의 낙랑국 건설, 한강 이남의 남삼한 건국 등이다.
이와 같이 부여사의 전모 뿐 아니라 기존의 고조선 강역에서 펼쳐지는 한민족사의 변천도 담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비해 부여사를 소상히 전하고 있는 만큼 『북부여기』와 『가섭원부여기』를 1차 사료로 삼아 교차 검증을 통해 내용을 검토하고 부여사를 복원해야 할 터인데, 중국 사서에 기대어 자국의 사서는 외면하는 현실은 그야말로 전도된 의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3. ‘북부여’라는 국호의 의미
고조선 멸망 후 열국시대에 접어들었을 때, 고조선의 국통을 계승한 나라는 북부여다. 북부여는 열국의 중심 역할을 했고, 환국·배달·단군조선의 삼성조(三聖祖) 역사와 이후의 삼국의 역사를 잇는 중요한 고리라고 할 수 있다. 북부여가 고조선을 계승했다면 나라 이름을 북조선이라 하지 않고 왜 북부여라 했을까. 고조선 말기 상황을 살펴보면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단군세기』에 따르면, 47세 단군의 역사로 이어진 고조선의 역사는 삼신오제(三神五帝) 사상을 국가 경영의 근본 원리로 삼아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로 나라를 삼분할(진한·번한·마한)하여 다스렸으며, 그중 중심이 되는 진한(辰韓)은 수도를 두 번 천도하면서 삼왕조 시대를 거치게 된다. 제2왕조의 끝자락인 43세 물리단군에 이르러서는 사냥꾼 우화충이 역모를 일으키는데, 이는 조선 말기에 이르러 국운이 이미 많이 쇠하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욕살 구물이 천명을 받들어 병사를 일으켜 역적을 토벌하고 우화충을 잡아 참수함으로써 그 공로를 인정받고 모든 장수의 추대를 받아 44세 구물단군으로 즉위하게 된다.
구물단군은 국운이 다해가는 조선을 다시 크게 일신하려는 뜻을 품게 되는데, 그 이면에는 신교(神敎)를 내려받는 사건이 있었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서 말하기를, “어느 날 꿈에 천상의 상제님께 가르침(夢敎)을 받고 정치를 크게 혁신하려 하셨다”고 전하면서, 아홉 가지 계율을 맹세하는 모임인 구서지회(九誓之會)를 결성하여 이 구서의 글로써 백성을 교화하였다고 한다. 구물단군은 신교를 내려받아 정치개혁의 움직임을 크게 일으키고 국호를 ‘대부여’라 하였다. 부여라는 나라가 처음 생긴 것은 『규원사화』 기록으로 알 수 있듯이 제1왕조 초대 단군의 넷째 아들 부여후가 세운 나라가 역사 기록상으로 전하는 첫 부여이다. 이후 제2왕조 색불루단군은 부여신궁에서 즉위하여 자신의 세력 근거지로 삼는 것으로 볼 때, 부여의 세력이 커져서 조선의 단군 자리에 오르게 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고, 제3왕조 구물단군 때는 부여를 국호로 삼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이것이 부여 발전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조선을 부여라 부르는 시대로 들어서고, 이때 일어난 구서지회의 광명정신과 회복정신, 부흥정신은 후대에 전개되는 역사에 큰 파급효과를 주는 분수령이 된다. 그중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는 대부여의 북쪽을 차지하였다는 의미로 북부여라 한 것이다. 약 2천 년 동안 지속된 조선이라는 국호를 이어받지 않고 2백 년 남짓 이어진 대부여의 국호를 계승함은 외형상의 지리적인 위치뿐 아니라 내적으로는 구서지회의 정신을 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4. 북부여의 건국자, 해모수
북부여 건국 과정은 고조선의 끝자락이자 대부여의 말기라고 할 수 있는 47세 고열가단군 때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단군세기』에 따르면 고열가는 43세 물리단군의 현손으로, 46세 보을단군 재위 당시 ‘한개’라는 인물이 역모를 일으켜 임금의 자리를 찬탈했을 때, 상장군으로서 의병을 일으켜 역적의 무리를 격파하고 보을단군을 다시 모셔 왔다. 난을 진압한 후에도 나라 상황이 좋지 않아 국력이 심히 약해졌고 보을단군은 후사 없이 붕어한다. 이어 고열가가 백성의 사랑과 공경을 받고 공로가 많아 단군으로 추대를 받아 즉위하게 되었는데, 고열가단군은 나라가 이미 국운이 다하였음을 내다보고 재위 58년(BCE 238)에 오가(五加)를 불러모아 현인을 택해 단군으로 천거하라고 하고 제위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선인(仙人)이 된다. 이로써 고조선의 중심인 진한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에 오가가 6년 동안 국사를 공동으로 집행하는 공화정 시대가 열리고, 기사년(BCE 232)에 오가를 설득하여 공화정을 철폐하고 고조선을 계승하여 단군으로 추대된 분이 있으니, 바로 북부여의 시조인 해모수다.
일찍이 해모수는 고열가단군이 퇴위하기 1년 전, 임술년(BCE 239) 4월 8일 웅심산(지금의 길림성 서란(舒蘭))에서 기두하여 북부여를 건국하였고 재위 8년(BCE 232)이 되는 해에 오가의 공화정 체제를 매듭짓고 고조선을 계승하게 된 것이다.
실제 북부여에서도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통치자의 호칭을 단군이라 칭했다는 것은 북부여가 고조선을 계승했음을 잘 나타낸다. 또한 『삼국유사』 <북부여 조>는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북부여사의 골자를 담고 있는데, 건국 관련 내용을 살펴보면 해모수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도읍하고 북부여를 세웠음을 기술하고 있다. 대개 천자를 상징하는 영물인 용이 다섯 마리나 등장하는 것은 이례적인 것으로, 이는 오가의 공화정 시대를 인계하여 새 역사시대를 여는 해모수의 등장을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또한 고조선을 계승한 적통국은 북부여임을 상징하는 것이며, 석주 이상룡 선생의 『석주유고』 「서사록」의 기록을 보면 독립운동가들 역시 고조선에서 북부여로 이어지는 국맥(國脈)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개 단군의 혈통은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3천 년 동안 끊어지지 않았다. 한 침상 위인데 다시 어디에 기씨(箕氏:기자)가 코를 골며 잠잘 곳이 있었겠는가?
- 『석주유고』 「서사록」, 1911년 2월 24일
고조선의 맥을 이은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는 사실상 북부여사를 말한다. 북부여는 <전기 북부여>와 <후기 북부여> 시대로 전개되는데, 전기 북부여에서 후기 북부여로 넘어가는 분기점에서 파생된 제후국이 ‘동부여’이고, ‘졸본부여’는 후기 북부여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는 북부여사의 전체적인 전개 과정을 나타내는 역사흐름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5. 북부여사의 전체 전개 과정
북부여는 약 180년(BCE 239~BCE 58) 동안 존속한다. 비교적 짧은 역사를 지녔지만, 환국·배달·조선의 삼성조 시대와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시대를 잇는 고리인 점을 생각한다면, 그 중요도는 국가 지속 기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북부여의 계보를 큰 틀에서 정리하자면, ‘전기 북부여’는 태조 해모수로부터 4세 고우루단군까지의 153년에 달하는 역사이고, ‘후기 북부여’는 5세 고두막단군과 6세 고무서단군까지 이어지는 28년의 역사이다. 이후 고구려의 건국자로 알려진 고주몽이 북부여의 단군의 위를 잇게 되는데, 그는 해모수의 현손으로서 북부여를 계승하여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게 된다. 즉 고주몽은 북부여의 7대 단군이자 고구려의 1대 태왕이 되는 것이다.
일설로는 해모수와 고주몽을 부자 관계라 하지만, 이것은 북부여사의 소실로 일어난 왜곡이고, 북부여사의 복원을 통해 4대조 혈통 관계임을 확인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도 이를 뒷받침하는데, ‘광개토태왕이 17세손’이라 함은 고구려의 창업조인 고주몽을 태조로 삼은 것이 아니라, 주몽의 4대 선조인 해모수를 태조로 삼아 혈통 계보를 계산하면 17세손이 됨을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장수왕이 세운 금석문임을 감안할 때 당대 고구려인들이 북부여를 계승한 의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북부여사의 복원으로 얻을 수 있는 역사의 진실은 이뿐만이 아니다. 위만조선의 실태를 파악하고 역사에서 지워진 인물인 고두막한을 되살릴 수 있으며, 북부여에서 국통이 고구려로 계승되는 과정과 더불어 최숭의 낙랑국과 남삼한의 형성에 대해서도 고찰할 수 있게 된다.
1) 위만조선은 성립하는가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삼조선의 분립은 조선 고사에 있어서 유일한 큰일이니, 이를 구별치 못하면 곧 그 이전에 대단군 왕검의 건국의 결론을 찾지 못할 것이요, 그 이후에 동·북부여와 고구려, 신라, 백제 등의 문화적 발전 서론(緖論)을 얻지 못할 것”이라 서술하였다. 삼한·삼조선에 대한 이해가 한민족사를 관통하는 핵심임을 설파하고 있다.
나라를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던 고조선은 삼일(三一) 사상을 바탕으로 진한·번한·마한이 셋이면서도 하나이고, 하나이면서도 셋이였다. 각기 통치권을 인정하면서도 전체를 아우르는 정치적 중심체 역할은 진한이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진한은 대단군이 통치하고, 번한과 마한에는 각기 부단군을 두는 형태였다. 그 말은 곧, 위만조선이 성립하려면 시기상으로 따져볼 때, 망명자 위만이 고조선 멸망 후 진한이 자리했던 만주지역에 들어선 북부여를 통치할 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위만은 북부여로 피난 온 것이 아니라, 고조선 개국 이래로 서방 진출의 교두보이자 외부 침략을 막는 방파제 구실을 하던 번조선 땅으로 망명을 했다. 당대에 북부여는 해모수가 다스리고 있었고, 번조선은 부단군 중 한 분인 기준 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기준이 위만을 결국 품어주지만, 이후 위만이 배반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것 모두 번조선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위만조선은 성립할 수 없고 ‘위만정권’이라 칭해야 합당하다 할 것이다.
또한 북부여 4세 고우루단군은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으나, 해성 이북의 영토를 빼앗기고 탈환하였다는 기록과 위씨 정권의 공격에 대비해 남려성에 군대를 배치한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북부여와 위씨 정권은 적국 관계로 위만조선이 단군조선을 계승하였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없다. 안정복은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다.”라고 했으며, 석주 이상룡은 “위만은 한 명의 강도에 불과하다.”하였고, 단재는 “위만 정권을 우리의 변강 침략사로 다루어야 한다.”라고 하여 굴절된 우리 역사에 일침을 가하였다.
2) 한 무제의 침략과 역사에서 잊힌 인물 고두막한
『사기』 「조선열전」은 BCE 109년, 한 무제의 동방 침략과 헛된 승리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동방 침략’이라 함은 한 무제가 위만의 손자 우거왕이 다스리던 위씨정권을 침략한 일이고, ‘헛된 승리’라 함은 좌장군 순체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육로를 공략함과 동시에 누선장군 양복에게 수군 7천을 보내 바닷길로 위만정권의 수도 왕험성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여러 차례 패하고 결국 위만정권 지도층의 내부 분열을 이용해 우거를 죽여 승리하게 됨을 말한다. 이에 대해 “양복과 순체의 양군은 모두 치욕을 당하였고, 장수들 중 누구도 제후로 봉해지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이것이 『사기』 「조선열전」이 전하는 위만정권과 한의 전쟁사이다.
그런데 『북부여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 무제가 이후 여세를 몰아 더욱 동쪽으로 진군한 기록을 전하는데, 북부여를 침공한 기사이다. 이때 역사상 가장 감춰지고 잊힌 북부여의 영웅적 인물이 등장하는데, 서압록 출신 고두막한이다. 고두막한은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이르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을 격파하였고, 그로 인해 한 무제 유철은 쓰디쓴 패배를 맛보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한 무제가 대패한 북부여와의 전쟁사는 『사기』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흉노에게 투항한 이릉에 대해 소신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한 무제의 미움을 사 궁형에 처해진 사마천이 아니었던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사서 집필을 완성하기 위해 치욕스러운 수치도 참아낸 사마천이지만, 조선사를 단군에 대한 언급 없이 위만부터 기술하면서 위만정권과 한의 전쟁사를 「조선열전」으로 이름 붙여 조선의 국통을 왜곡한 점, 한나라의 사관인 사마천이 자기 당대의 일임에도 한 무제가 대패한 북부여와의 전쟁사는 기록하지 않은 점은 그야말로 궁여지책의 곡필이라 할 수 있다. 그로 인해 고두막한이 역사에 묻힌 것은 당연지사이다. 단재가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에서 중국 역사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사마천을 “공자 『춘추』의 존화양이, 상내약외, 위국휘치 등의 주의를 굳게 지키던 완유(頑儒)”라고 혹평한 것도 이해되는 바이다.
3) 고두막한은 누구인가
고두막한은 북부여 역사에서는 새로운 분기점을 연 역사적 인물이다. 고조선의 47세 고열가단군의 후예로 사람됨이 호방하고 영준하며 용병을 잘하였고, 북부여를 침공한 한나라 군대를 물리쳐 나라를 구하였다. 이에 졸본(卒本)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호를 동명(東明)이라 하였는데, 이 나라를 졸본부여 또는 동명부여라 한다. 일반적으로 고주몽의 시호가 동명성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역사 기록상으로 동명의 시호를 가장 먼저 쓴 분은 고두막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연남산의 묘지명」이라든지 「김천령의 부(賦)」를 보면 동명과 주몽을 별도의 인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고두막한과 고주몽에 대한 기록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고두막한은 동부여 탄생 배경의 결정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북부여의 왕이던 해부루가 자신의 세력 근거지를 버리고 동쪽으로 옮겨가 가섭원에 동부여(가섭원부여)를 개국하게 된 이유를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선 해부루의 대신 아란불이 꿈에서 상제(천제, 천신)의 명을 받고 이동하는 것으로 기록한다. 같은 기록이지만, 『북부여기』는 천제의 아들임을 주장하는 고두막한의 위압으로 기존의 북부여 세력이 동쪽으로 옮겨감을 기술하고 있다. 결국 해부루왕이 가섭원으로 옮겨가게 되고, 고두막한은 북부여의 도성에 입성하여 후기 북부여 시대를 열게 되는 것이다.
고두막의 다른 이름을 ‘두막루’라고 전하는데, 6세기 중반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에 두막루국을 ‘옛날의 북부여’라 한 기록이 나온다. 고두막단군의 치세로 열린 후기 북부여는 아들인 6세 고무서단군에게 이어지고, 고무서단군은 아들이 없어 사위로 들인 인물에게 왕위를 잇게 되는데, 그 분이 고주몽이다.
이상에서 한국사의 잃어버린 고리인 북부여에 대해 살펴보았다. 고구려의 시조인 고주몽은 앞서 언급했듯이 해모수의 현손으로 북부여의 7대 단군으로 즉위하고, 이후 ‘고구려’로 국호를 바꾸게 된다. 『삼국유사』 <고구려 조>의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다.”라는 기록은 후기 북부여를 졸본부여라고도 하기에, 곧 북부여를 이은 것이 고구려라는 것이다. 북부여의 정통은 고구려가 잇게 되며,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예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유리가 고구려의 맥을 이어가게 된다.
고주몽은 북부여에 와서는 고무서 단군의 딸 소서노 공주와 결혼하여 비류·온조를 낳게 되는데 이들은 이후 백제의 시조가 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백제는 고구려와 한가지로 부여에서 나왔다’는 기록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5세 고두막 단군에게 파소라는 딸이 있었는데, 지아비를 알 순 없지만 임신을 하게 되고 이후 경주 땅으로 내려가 신라의 건국자 박혁거세를 낳게 된다. ‘신라의 선계는 본래 진한종(辰韓種)’이라 하니 고조선의 진한 사람들이 경주에 정착했다고 볼 수 있고, 지도자인 박혁거세는 북부여에 연원을 두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삼국은 모두 북부여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짧은 역사 기간이지만 고조선-북부여-삼국으로 이어지는 국통을 볼 때, 북부여를 복원하는 것은 한민족사의 혈맥이 관통되는 중차대한 일임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